참가후기

University of Minnesota

2014.04.11 김정철 해외단기유학
단기 유학을 다녀 와서…

 

1. 군 휴학 때에 갖게 된 단기 유학의 동기

 

02년도에 입학을 하면서부터 단기 유학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줄곧 들어왔다. 하지만 유학에 별 생각이 없었고, 영어에 대한 중요성도 알지 못했던 대학 1,2 학년의 나로서는 단기유학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공익요원으로 사회에서 군생활을 하게 되면서 보다 넓은 시야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시에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체득하게 되면서 ‘나도 한번 단기 유학을 가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익시절 초기에는 단기유학에 대해 그다지 좋은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영어를 늘리기 위함이라면 나중에 제대로 어학연수를 간다거나 유학을 가는 것이 낫지 기껏 1학기 혹은 1년 가서 얼마나 늘겠느냐. 괜히 시간 낭비 하면서 놀다가 오지 말고, 학교공부나 하자.’ 라는 생각이었고, 당시 영어를 시작한 것은 아직 넘기지 못한 졸업 토플점수를 따기 위함이었다. 영어 회화학원을 함께 다녔었는데, 그것은 그저 막연한 미래를 위한 준비 과정 내지는 시간 낭비 방지 수단이었을 뿐 내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토플과 영어 회화는 내게 단기유학의 가능성을 제공함과 동시에 더욱더 유창한 영어에 대한 욕심을 갖게 하였다. 또 취업 및 대학원 진학이 다가올수록 유학이라는 옵션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성이 생기면서 단기유학은 내게 점점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단기유학 과정은 2007년 8월 14일 에서 2008년 1월 1일까지의 1학기 과정으로 끝이 났고, 기존에 생각했던 영어회화와 유학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 면에서도 만족할만한 소득을 얻게 되었다. 지금부터 나의 단기유학과정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로부터 얻은 나의 감상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전체적인 평가를 하자면 미국에 있었던 그 시간들은 짧았지만 내 인생에 정말 소중했던 시간들로 생각 되어 진다.

 

2. 전체적인 연수 내용 및 감상

 

(1) 출발하기 이 전에…

 

단기 유학 오리엔테이션 과정들을 통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면서 생각보다 순탄하게 나의 준비과정이 흘러가진 않았다. I-20 가 5월에 와야 했는데 집 주소를 그 쪽에서 잘 못 기재하는 바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6월 25일 즈음이 되어서야 I-20 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자 받는 일정도 늦어지게 되었다. 미국에 처음 가는 나로서는 이러다가 단기유학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들었었다. 미국 비자를 받을 시에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였는데 예상 외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비행기 표는 I-20 가 없어도 구입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I-20 만을 기다리다가 너무 늦게 구입하면서 비싼 돈을 주고,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다. 미네소타 학교에서 기숙사를 유학생에게 따로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는 점과 학기가 시작하고,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등록금을 수강신청이 완전히 끝난 후에 납부하게 되어있는 시스템 등은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는 다소 불안함을 가져다 주게 하였다.

 

(2) 미국에 도착해서…

 

2007년 8월 14일에 한국을 출발하게 되었다. 낯선 땅에 혼자 떨어져야 했어서 여러 가지로 두려운 것이 많았는데, 비싸게 주고 산 대한항공 비행기 덕분에 비행기 내의 다수가 한국인이어서 이런 두려움을 좀 덜을 수 있었다. 시카고 O’ hare 공항에 내려서 사람들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서 입국 신고를 마쳤다. 미국에 오기 전에 약 2년 정도 회화학원에 다닌 경험이 있어서 영어에 나름 자신이 생겼는데 입국할 때 나에게 가차없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경찰관 때문에 그런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때부터 나의 영어의 진짜 실력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미국인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 순간이 수 차례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대답하거나 행동하지 못했다.

 

   1) 어렵게 얻은 집 미네소타 대학교에서는 유학생을 위해서 기숙사를 따로 배정해 주지 않았다. 개강하기 이전까지 머물 임시 기숙사면 제공할 뿐이다. 따라서 미리 기숙사 신청을 할 수 있었던 재학생들에게 우선권이 돌아갔고, 신입생이 많이 들어온 2007년에는 더욱더 기숙사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비싸더라도 안정적으로 기숙사에서 살기를 원했었지만 할 수 없이 직접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1년 단위로 계약을 보통 하기 때문에 1학기 짜리 계약 되는 집을 찾기는 정말로 어려웠다. 다행히도 한 곳을 찾을 수가 있어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집값도 기숙사의 반도 안되고, 대형 마트도 가까워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2) 주 교통수단은 자전거 가서 자전거를 우선 샀다. Target 같은 대형 마트에 가면 자전거를 싸게 구할 수 있어서 가능한 모든 이동은 자전거로 하였다. 실제로 자전거 이용 인원이 꽤 되었다. 버스비를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개강하기 이전까지 이 자전거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준비를 제대로 할 수가 있었다.

 

(3) 학교에서의 생활

 

  1) 정규 커리큘럼

 

우선 정규 수업으로는 3과목을 들었는데, 설계과목(기계과), 통계과목(통계과), 해석학(수학과) 이들이었다. 설계 과목은 졸업을 하기 위해서 그 학기에 반드시 들었어야 하는 과목이기에 신청을 하였고, 해석학 과목과 통계 과목은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분야이기에 들었다. 처음에 교수님의 말이 너무 빨라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그래도 꽤나 익숙해졌지만 마지막까지도 교수님의 강의가 매우 편하게 들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숙제를 미리 하면서 다음 수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을 갖춘 채 수업을 들으면서 수업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Postech 학생들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신경을 써서 공부하는 시험이면 어김없이 최상위권이 머물 수 있었고, 자신 없다고 본 시험도 언제나 상위에 링크 되는 것을 보고, 역시 우리학교 (Postech) 가 잘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설계 과목을 들으면서 조를 짜서 Project 를 하여 RE 라는 기업과 연계하는 Contest 를 했는데,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리드를 한 우리 조가 1위를 했던 점이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미국인들 앞에서 프로젝트 발표를 했다 라는 점과 미국인과 함께한 조에서 내가 리드를 했었다는 점이 너무 뿌듯했다. 그 외에 숙제를 하는 것이나 시험을 보는 시스템 등을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는 전반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듯 했다. 우선 의견을 내는 것이 굉장히 자유로웠다. 우리 학교에서는 프로젝트 주제를 정하고자 한다면 거의 반나절 걸리고도 제대로 된 주제가 안 나와서 잘 못 정하는 일이 허다한데 미국 애들과 할 때에는 주제 정하는데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0 분여 동안에 괜찮던 안 괜찮던 수많은 주제거리가 나왔고, 남은 5분 동안 그 중에 가장 괜찮은 주제를 선정하여 최종적인 결정을 하게 되었다. 토론 문화가 발달하고, 자신의 생각에 언제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모습이 상당히 부러웠다.

 

2) 아르바이트

 

미네소타 대학교에서는 일주일에 최대 20 시간 정도 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아르바이트 거리를 제공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거리가 밤에 경비 보는 것과 기숙사 청소 정도였다. 나는 기숙사 청소를 신청했고, 그곳에서 미국인들의 기숙사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급여는 시간당 8.3달러 정도로 우리 나라보다 훨씬 많이 주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미국의 임금체계에서는 가장 낮은 수준에 속했다. 만일 나의 영어가 유창했다면 가능한 임금은 시간 당 20 달러를 넘었을 것이다. 이 아르바이트 생활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서 소중한 미국인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점이었다. 우연히 만났던 그 친구와는 미국을 떠날 때까지 같이 많이 다니고, 그를 통해서 여러 미국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3) 그 외의 활동

 

최대한 international student 와 많이 접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에 가능한 이런 저런 활동에 많이 참여하였다. 우선 지구촌에서 가장 인기 좋은 스포츠인 축구를 통해서 여러 나라의 학생들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 5시 도서관 앞의 잔디밭에 가면 어김없이 축구경기가 있었고, 그 외에 중국 친구들과도 토요일마다 할 수 있었고, 돈을 약간 내고, 축구 동아리에 가입하여 11월 초순까지 축구를 매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축구에 대해서는 굉장히 활동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한국인 유학생 축구 회에도 가입하여 나름대로 자주 축구를 했었고, 그 안에서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댄스에 관련된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단체에서 싸게 여러 강좌를 열어 주어서 탭댄스와 힙합 댄스 강좌를 그곳에 가서 들었다. 또 미국인 친구가 스윙 댄스 동아리 모임을 알아내서 그곳에 가서 댄스를 배운 바 있다. 여학생들과 함께 하는 이런 댄스는 내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 외에도 각국의 문화를 어린 아이들에게 소개해주는 모임에도 잠시 나갔었고,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여러 모임에도 참여하였다.

 

4) 옷과 음식

 

옷은 한국에서 많이 가져가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또 많이 사게 되었다. 실제로 옷들이 한국에서보다 너무 싸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옷을 구입했는데 주로 대형 몰이나 아울렛 같은 곳이 가서 샀다. 다만 사이즈 구성이 우리나라와 좀 다르기 때문에 내게 적합한 옷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음식은 집에서 주로 해먹거나 사먹었다. 미국 전통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해봤었는데 피자, 스테이크, 햄버거가 전부인 듯 했다. 다만 미국에서는 저런 음식들 이외에 여러 나라의 음식들을(지중해음식, 멕시코 음식, 중국 음식, 베트남 음식 등) 접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밖에서 먹으려면 매일 고기를 먹어야 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취사시설이 있는 집이 너무 좋았다. 음식 거리는 자전거로 약 30 분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서 사왔는데 집에서 해먹으면서 식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기껏 스테이크나 치킨 정도가 다였는데 나중에는 닭도리탕, 제육볶음, 게요리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5) 친구 사귐과 미국인의 사고 방식

 

그곳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는 3명으로 미국인 1명, 대만인 1명, 중국인 1명이다. 그 외에 마주치면 인사할 정도의 친구들은 있지만 우리 문화와는 다르게 이 정도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friend 라고 칭하지 않는 듯 했다. 자주 연락하거나 고민을 쉽게 털어 놓고, 특정 날에 모여서 술잔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friend 라는 테두리 안에 넣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만난 미국 친구와는 옷 사러도 자주 가고, 축구 경기도 보러 갔으며, 거의 주말마다 만나서 서로의 집에 가던가 백인들의 파티에도 참여하곤 했었다.

 

미국인들은 각자의 사생활을 굉장히 존중하면서 동시에 개인주의에도 빠져 있는 만큼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함이 적은 한국인의 정서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내가 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솔직히 미국인보다는 대만인이나 중국인 같은 동양인이 사실 편했다. 그것은 같이 문화를 공유하는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인들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면서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준법 정신이 강하고, 일반적으로는 서로 신뢰를 하면서 범법 여부에 대해서 그리 까다롭게 체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규정을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거절하거나 처벌하고 신뢰를 져버린다. 따라서 그런 그들의 문화가 아직 베어있지 않은 나로서는 모든 행동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의 경계가 뚜렷하여 남의 호의를 선뜻 받지 않고, 물론 잘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쉽게 말하는 “내가 이 음료수 쏠께.” 와 같은 것도 그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아 물론 친한 친구가 되면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 그렇게 사주면서도 항상 ‘그 이전에 네가 무엇무엇을 해주었으니 내가 사는 것이다.’ 와 같은 발언을 한다. 마치 자신의 호의를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을 우려해서 하는 것 같았다.

 

미국인과 한국인의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남의 행동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누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면 ‘아 내가 이러면 남들이 욕할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제를 하는데 미국인은 그런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내가 좋으니 길가다 춤을 춰도 되는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해서 남들이 모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는 것이 미국인의 사고 방식이다. 따라서 미국인 여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다면 축구든 foot ball 이든 다 참여를 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어필을 한다. 카메라만 비추어 지면 숨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나라 여자들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어느 것이나 극단적인 것은 좋지 않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의 의사에 대해서 좀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 미국인 문화의 특징을 말하자면 성적인 개방성과 백인과 흑인의 차별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6) 여행

 

여행은 2번을 다녀왔는데, Thanks giving 때와 학기를 마치고 나서 갔다 왔다. 전자는 Chicago 에 갔었고, 후자는 LA, Las Vegas, New York, Washington 에 다녀 왔다. Chicago 에 갈 때에는 그곳에서 만난 친절한 형의 차를 타고 갔다 왔으므로 교통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다만 호텔에 대해서는 여행사를 통해서 예약을 하느라 좀 비싼 값에 구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호텔 및 비행기들은 특정 예매 사이트를 통하면 굉장히 싸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학기 끝나고 간 긴 여행에서는 그 사이트에서 모두 구매를 하게 되었다. 미국의 모든 도시는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었지만 가장 즐거웠던 곳을 꼽으라면 Las Vegas 를 꼽는다. 빛의 도시라는 그 이름대로 밤의 거리는 너무도 화려했고, 여러 가지로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 했다. 물론 밤에 하는 도박도 꽤나 재미 있었다. 돈을 따고자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리면서 다녔던 나로서는 돈의 따고 잃음을 떠나서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낯선 땅에서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 일을 다 처리하면서 미국 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서 상당히 뿌듯했다.

 

7) 날씨

 

미네소타를 얘기하면서 날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여름에는 한국처럼 덥지만 비만 오면 바로 늦가을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워진다. 알래스카 쪽에서 오는 찬 바람과 플로리다 쪽에서 오는 따뜻한 바람이 만나는 곳이 미네소타는 이 둘의 힘 싸움에 따라 각 날의 날씨가 하루 사이로도 크게 바뀐다. 때문에 늦은 가을(11월) 일지라도 따뜻한 날은 반팔을 입어야 하고, 다음날은 날씨가 크게 추워져서 코트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겨울에는 섭씨 영하 30 도 이하로도 내려간다는데 내가 머물렀던 12월 말까지는 영하 약 23도 정도 까지만 내려갔었다. 어떤 건물이든 난방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건물 내부에서의 활동은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다만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는 쉽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실 때에 목구멍이 살짝 어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 혼자 느끼기에는 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이 들어서 자전거 타는 것은 어느 정도 선에서 자제를 하였다.

 

8) 영어

 

내가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에 주위 사람들은 상당수가 “영어 공부를 하려면 가서 미국 친구 사귀고, 걔네들과 놀아라.” 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말은 너무도 실행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미국에 가서 깨닫게 되었다. 영어를 잘하려면 미국인 친구가 필요하지만 그 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영어 회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 짧은 기간이지만 나는 여러모로 노력 했다. 티비를 하나 사서 틈 날 때마다 틀어 놓고, 언제나 귀에는 라디오를 꽂고 다녔다. 또한 하루에 봐야 할 미국 드라마 분량을 정하고, 한번은 그냥 무자막으로 보고, 한번은 영어 자막으로 보면서 눈여겨 볼 만한 문장들을 모두 정리한 후 익혔다. 그런 말들을 실제 생활에 쓰면서 체득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 미국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라면 가리지 않고 나갔다. 또 모르는 말이 있다면 어떤 대화 상대이던지 잡고 양해를 구한 후 물어보았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게 물어보았던 모든 미국인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가끔은 종이에 써주면서 설명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아르바이트 때에 우연히 운 좋게 사귀게 된 착한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을 길게 할 수 있으면서 이런 식의 영어 공부는 꽤나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일반적으로 영어를 크게 늘게 하려면 2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6개월 머무는 것이라면 그냥 미국 문화를 즐기다가 가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직접 영어 쪽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를 하니 아주 많이 늘진 않아도 꽤나 실력이 향상된걸 올 때 즈음에는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어학연수 10 개월 과정 동안 한국말을 거의 안 쓰고, 영어 공부만 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의 영어 수준은 정말 상당했다. 시작할 때에는 그저 명사들만 죽 이어서 말해야 했을 정도라고 하니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10월초쯤이었는데 그걸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랬다면 보다 더 일찍 영어 공부를 잘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 지금보다 더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3. 기대 효과

 

우선 영어 회화 부분에서 여러 가지로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말하는 것에 자신감이 붙은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까지 내가 공부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공부해야 할 지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 되었다. 내가 여태껏 공부한 것이 실제 영어와는 거리가 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이제 진짜 영어를 공부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고, 단순히 남들 하는 학원 커리큘럼을 따라간다기 보다는 나의 수준에 맞는 올바른 영어 공부 방식을 찾아서 공부 하게 되었다.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이 같은 것이 쌓여서 나중에 정말 큰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 한다. 그리고 유학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나는 무조건 한국에 살아야 한다는 예전의 어렸던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대학원 진학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미국 내에서의 대학원생들의 실태 등도 알게 되면서 유학의 선택에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감도 적지 않게 커졌다. 애초에 자기소개서에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겠다.” 라고 의지를 적어 보냈는데, 실제로 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성적 내지는 실적을 보이면서 세계 속의 내 수준을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나의 학교에(Postech) 대한 프라이드를 다시금 갖게 했고, 학교 공부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 주었다.

 

4. 건의 사항

 

미국 실상에 대한 정보를 좀 자세히 알려주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생각보다 미국 사람들은 굉장히 게을렀고, 공사는 정확하게 구분하지만 특별히 마감일자 등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일쑤였다. 또한 인권비가 너무 비싸서인지 택배 배달이 와서 한번에 전달을 못해주면 절대로 다시 오질 않기에 알아서 창고로 와서 찾아가야 했고, 신용 사회인만큼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이 우리 나라보다 확실히 더 컸다. 이러한 사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나는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 문화의 이해 라는 식의 이름으로 단기 유학자에게 어느 정도의 교육 내지는 핸드 아웃 같은 것이 있어서 사전에 미리 준비 시킨다면 유학생활이 보다 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